본문 바로가기

스포츠둥지 기자단

[초창기 한국 럭비] ‘청년’ 김경진 이야기

[초창기 한국 럭비] ‘청년김경진 이야기

김민규

 

 

 

 

 

 

영국이 발상지인 럭비는 스포츠에서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가치가 많이 내재된 대표적인 종목이다. 운동 종목에서 가장 많은 선수들이(15인제) 출전하고 경기 시작할 때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먼저 뒤로 볼을 패스한다. 어떤 종목보다 격렬한 경기를 벌이지만 일단 경기가 끝나면 ‘No side’라는 심판의 선언과 함께 서로를 격려하며 위로한다. 사회적인 연대와 페어플레이를 배울 수 있는 대표적인 종목이다.

 

역동적인 스포츠인 럭비는 국내서는 아직까지 많이 보급되지는 않았다. 럭비는 일본에 먼저 보급되었으며 이후 1927년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나라에 럭비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1929년 당시 보성전문학교(現 고려대학교)에서 일본계가 아닌 한국인이 중심이 된 럭비 팀을 만들었고 점차 사립학교와 공립학교에 럭비가 전파되었다. 당시 서울소재 사립학교 모두 럭비 팀이 있을 정도로 당시 럭비의 인기는 상당하였다.

 

한국 초창기 럭비 이야기를 듣기 위해 <스포츠둥지>가 前 럭비선수 김경진(80, 고려대학교 56, 영문)를 찾았다. 그는 중고등학교 럭비선수로 활동하였으며 1956년 고려대학교에 진학하여 럭비 선수로서 활동을 이어갔다. 김경진 박사의 이야기를 통해 초창기 한국 럭비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 (왼쪽) 고등학교 3학년 당시 럭비 축구부 주장이었던 청년김경진

▲ (오른쪽) 50년대 초 경동고등학교 럭비 축구부 연습 *스크럼(Scrum)장면

*스크럼(Scrum): 선수들이 서로 팔을 건 상태에서 상대팀을 앞으로 밀치는 대형

 

 

“축구선수였던 아버지 그리고 학교 선생님이었던 어머니


-당시 운동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럭비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아버지는 축구선수였고 어머니는 학교 선생님이었네. 그렇다 보니 운동을 하는데 있어서 반대는 전혀 없었네. 중학교 입학 당시 야구선수로 활동했는데 홈런볼을 주우러 학교 옆 운동장에 갔다가 럭비 축구부 감독의 눈에 띄어버렸어. “럭비 할 생각 없냐는 감독의 말에 럭비 축구부로 옮겼지. 당시 야구부가 매우 엄했거든.”

 

-중학생 때부터 럭비선수로 활동하신 거네요?

그렇지. 중학교 때 럭비를 배우고 경동고등학교에 진학해서 럭비를 계속 했네. 당시 럭비를 가르치는 선생이 지명렬이라고 나중에 서울대에서 독문학을 가르치기까지 했던 교수인데 이분 밑에서 럭비를 배웠네. 럭비 축구부 규모는 20명 내외 정도 됐네

일본인들과도 경기를 하고 했는데 스크럼을 할 때 마늘 냄새 지독하다고 뭐라고 하더라고. 그 사람들도 특유의 냄새가 나긴 했는데 말이야. 물론 마늘 냄새가 독하긴 하지.”

 

 

 

▲ 1955년 럭비 대회 우승 후 경동고등학교 럭비 축구부 단체사진

 

 

-당시 연습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궁금합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시업 후 보통 3~4시간씩 매일 연습을 했네. 시합이 있으면 합숙까지 하곤 했는데 그러면 큰집 한 채 빌려서 거기서 밥도 먹고 잠도 잤어. 럭비공도 워낙 귀해서 시합 전에 공에 바람도 넣고 바느질도 하고 했네. 스파이크도 다 수선해서 썼어.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지.”

 

-당시 흙 구장에서 연습을 하면 부상 위험이 꽤 있었을 텐데.

그래서 낙법 하나는 열심히 배웠어. 잘 구르면 다치지는 않았네. 명치를 맞지 않는 한 크게 부상당해서 문제가 되는 경우는 없었네. 보호 장비라고는 헤드기어 하나뿐이지만 서로 규칙을 지키면서 연습하면 크게 다치지 않는다네.”

 

 

 

 고려대학교 재학 당시 김경진 (오른쪽에서 두 번째)

 

 

 

-결국 고려대학교에 진학을 하셨는데 왜 영문학을 선택하셨는지.

럭비 축구부가 있는 팀이 고려대를 포함해서 서울대, 교대, 연희(現 연세대학교), 신흥대(現 경희대학교), 동국대, 단국대 정도가 있었네. 당시 독일어를 가르쳤던 선생님께서 영어와 운동을 같이 할 수 있는 고려대학교 영문과를 추천했어.”

고려대학교 5Big 클럽(야구, 농구, 하이스하키, 축구, 럭비) 이렇게 5개 종목은 학교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한다네. 석사 학위 이상의 감독 코치를 고용하여 가르치기에 부족한 것 없이 럭비선수로 활동했다네. 지금이야 한 팀의 선수가 40명 내외 정도 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팀 인원수가 아마 20명 정도 됐을 거야.”

 

4.19혁명 럭비 선수로서의 생을 마감하다


대학교 4학년으로 재학 중이던 김경진은 1960년 4.19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1960년 4월 11일 마산에서 실종되었던 김주열군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참혹한 시체로 발견되면서 이에 시민들이 분노해 2차 시위가 발생하였다.

당시 1960년 4월 18일 고려대학교 4천여명 학생은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하여 봉화를 높이 들자”는 선언문을 낭독하며 국회의사당에 나아갔다가 해산한다. 다음날 19일 20여명이 채 안되는 고려대 럭비부원들 또한 시위에 참여한다. 이 과정에서 개인자격으로 참여한 ‘청년’ 김경진은 총상을 입게 된다.


 

 

 

 

 

▲ 4.19 운동 당시 피격 후 수술을 받은 오른팔

 

병원에 2달 정도 입원을 했는데 수술이 제대로 안됐어. 당시 의료시설 상태로는 다친 오른팔을 제대로 치료 할 수가 없었던 거 같네. 아마 신경이 다쳤던 모양이야. 결국 손목도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됐는데 결국 뼈를 손목 부근에 이식하여 그나마 손에 힘을 줄 수 있게 되었네.”

다시 운동을 하려고 했는데 패스를 받으면 손에 힘을 줄 수 없으니 공을 자꾸 놓치더라고. 대학교 마지막 해는 그렇게 생활하다가 결국 OB팀으로 들어갔네. YB로서 선수생활은 끝난 거지. 이후 이 부상 때문에 국가 유공자가 되었네.”

 

고려대 OB로서의 활동을 이어가다.

김경진은 고려대 OB로서 럭비활동을 꾸준히 해왔다. 한번은 미국, 캐나다, 일본의 럭비팀과 친선전을 통해 럭비로서 교류를 하기도 하였고 졸업한 선배로서 교우회에 참여하여 YB선수들을 지원했다. 이후 와세다대학과 럭비 교류전 참여를 위해 일본에 가기도 하였다.

김경진이 고려대학교 재학 당시 일본과의 교류는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1961년부터 일본 와세다대학과 고려대학교는 축구경기를 시작으로 매년 도쿄와 서울을 오가며 정기전을 하기 시작하게 된다. 럭비 교류전은 2004년부터 시작하게 되었는데 김경진은 더 이상 경기를 출전할 수 없지만, 고려대 OB로서 경기를 참관하면서 고려대 OB로서 활동을 꾸준히 이어갔다.


-선생님에게 럭비란 무엇입니까?

 럭비는 정말 신사적인 스포츠지. 럭비를 통해서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성숙해질 수 있었네. 자칫 위험할 수 있는 경기지만 부당한 태클로 상대방을 가격하는 것은 거의 있지도 않거니와 있을 수도 없어. 그래서 이런 경기 매너 때문에 럭비경기에서는 보호장구마저도 거의 착용하지 않는다네.”

발생지 영국에서는 최고의 신사적 스포츠로 간주되고 있어. 영국의 옥스포드, 캠브릿지대학의 럭비 경기는 최고의 명 경기로 평가 되고 있다네.”

 

-기회가 된다면 럭비 경기를 한번 보고 싶네요.

“5 14일에 아시아 럭비 챔피언십 경기가 열린다네. 우리나라와 홍콩이 맞붙는 경기인데 자네가 럭비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게야. 이후에 한·일전도 있으니 놓치지 말고 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