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성호 (한양대학교 영문학 명예교수)
김연아가 독일에서 열린 2012 NRW 트로피 여자 싱글 프리 스케이팅에서 우승했다. 김연아는 12월 8일 <흡혈귀의 키스 Kiss of Vampire>를 배경음악으로 벌린 쇼트 프로그램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고, 그 다음날인 9일 <뮤지컬 레미제라블 Les Miserables Musical>의 하이라이트에 맞춘 프리 스케이팅에서도 최고점수를 얻어 다시 정상에 오른 것이다.
김연아 ⓒ대한체육회
*본 대회관련 사진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뮤지컬 레미제라블>은 프랑스 작가 위고 Victor Hugo의 소설 <레미제라블>에 근거를 두고 만든 뮤지컬이다. <레미제라블>은 그 파란만장한 삶을 산 주인공 ‘장발장 Jean Valjean’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장편소설이다. 누구나 재미있게 읽어본 이야기다. 굶주린 여동생을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친 것이 화근이 되어 19년간을 복역하고 가석방되었지만 장발장은 노란 가출옥허가증을 늘 달고 다녀야만했다. 그는 한 주교의 후대를 받고도 은촛대 두개를 훔쳤다가 다시 체포된다. 그러나 그 촛대는 그가 훔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준 것이라는 주교의 변호에 크게 감명을 받고 장발장은 새 생활을 시작한다. 이렇게 이어지는 이 흥미진진한 스토리는 우리가 어렸을 때 밤새우며 읽던 소설이다.
이 스토리에 곡을 붙여 우리나라에서도 공연되어 인기를 얻은 뮤지컬이 되었다. 이 뮤지컬은 20여 곡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곡 중에서 하이라이트 몇 곡을 골라 이번에 김연아의 프리 스케이팅 프로그램의 배경음악이 된 것이다.
김연아는 먼저 프랑스 뚜루 감옥소의 죄수들이 절망 속에서 부르는 서곡 ‘노동의 노래 Work Song'를 들으며 스케이팅을 시작한다. 반투명 검정회색 옷을 입은 김연아는 거부의 자태인양 두 팔을 엑스 자 모양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다가 첫 스텝을 내디딘다. 얼음 판위를 미끄러지듯 나가다가 곧 고난도 트리플 러츠(triple lutz)와 트리플 토룹(triple toe loop)으로 이어지는 3-3콤비네이션 점프를 성공시킨다. 죄수들의 깊은 정망과 강렬한 분노의 심정에 자기를 이입시키려는 변신의 몸짓인지 모른다.
마들렌 Madeleine으로 개명한 장발장은 이제 부자가 되어 공장의 주인이 되고 당당한 시장이 된다. 그는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다. 그가 운영하는 공장의 여직원 중 한 사람이 운명의 여인 판틴Fantine이다. 판틴은 죽음을 앞두고 남몰래 하숙집에 맡겨 키워온 딸 코세트 Cosette를 그에게 부탁한다. 물론 그러겠다고 약속한다. 이런 중간 이야기는 여기서 생략 되었지만, 여기에 바로 이어지는 곡은 ‘내일 One Day More’이다. 프랑스 혁명을 향한 젊은 이상주의자들이 군인들과 대치하며 부르는 기대와 희망의 노래다. 김연아는 비교적 가벼운 스텝으로 이 장면을 처리한다.
이제 제2막의 장면이 열린다. 하숙집 딸 에포닌 Eponine은 짝사랑하던 마리우스Marius의 마음이 결국 자기보다는 판틴의 딸 코세트에게로 갔음을 직감한다. 이제 그를 보낼 수밖에 없게 되었지만, 그러나 마리우스가 참여하는 혁명운동에 자기도 기꺼이 함께 참여하겠다는 결심을 보이는, 처절하지만 아름다운 솔로 서정곡 ‘나의 길 On My Own'을 얼음 판위에 김연아가 담는다. 김연아는 스케이트를 옆으로 끄는 날 소리가 갑작스럽게 멈추더니 이내 서정이 넘치는 음악에 따라 둥근 원을 그리다가 다시 높은 점프를 뛰고 이른바 싯 스핀 sit spin과 업라잇 스핀 upright spin을 한다. 이렇게 다시 변신을 하고 그리고 긴 활강을 한다. 스핀은 변신의 몸부림이다. 두 팔을 벌리고 한발을 위로 올린 채 미끄러지는 활강은 틀림없이 자유를 향한 멋진 몸짓이다. 이번에는 상대적으로 활강이 짧았지만 나는 이 미끄러지는 자유를 향한 갈망의 몸짓을 좋아한다. 하늘을 나는 아름다운 새의 모습니다.
마지막 장면이다. 제1막이 끝날 무렵 혁명을 지지하는 젊은이들이 거리로 뛰쳐나오면서 부른 노래가 <군중이 부르는 노래가 들리는가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이었다. 군인들과 대치하는 바리케이트 앞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이 노래를 다시 부르기 시작한다. 혁명의 기운이 한껏 치솟는 노래다. 김연아는 이 노래를 들으며 도약을 상징하듯 한 발을 딛고 회전을 하다가 드디어 하늘을 향해 오른팔 뻗어 올리며 멋진 마무리를 짓는다.
고뇌, 절망, 절규가 한쪽에서 흐르는 주제라면 이에 맞서며 흐르는 주제는 희망, 의지, 기대다. 두 주제는 어느 것이 부제인지 모르게 서로 엇비끼며 어름 위를 흘렀다. 이 두 주제를 말끔하게 처리한 김연아 선수의 유연하면서도 단호한 모습이 크게 돋보이는 멋진 한판이었다.
ⓒ 스포츠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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