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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별 체육이야기/[ 전문체육 ]

‘이 스포츠(e-sports)’, 순진한 곰과 영리한 주인 이야기

 

                                                                           글 / 김홍식 (한국체육대학교 사회체육학부 조교수)

 

새로운 이름, ‘이 스포츠(e-sports)’

전자통신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컴퓨터 게임 또는 인터넷 게임의 인기가 대단하다.
인터넷 강국 대한민국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 사례라고 한다. 이러한 게임들은
'이 스포츠(e-sports)'로 지칭된다. 인터넷 매체는 물론이고 신문방송, 학술논문 등에서도
거의 그렇다.


우리 말할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 스포츠(e-sports)’라는 말을 만들고 사용할 자격이 있다. 
‘이 스포츠(e-sports)’라는 음성적 기호에 각양각색의 자의적 의미를 붙여 사용할 수도 있다.
“언어의 의미는 사용이다(meaning is use)”라는 문장으로 축약되는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언어게임이론(game theory of language)'에 따르면, '이 스포츠'라는 단어의 의미는 그 단어를
둘러싼 언어 게임에 참가하는(그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명시적 또는 암묵적 약정이다.


개명(改名)과 변신(變身)


'이 스포츠'라는 용어는 어떻게 등장하였는가? 그 등장을 주도한 사람들은 왜
'이 스포츠'라는 이름을 사용했을까? 등장 초기 '이 스포츠'는 '이 게임(e-game)'으로 불렸다.
지금의 '이 스포츠'는 '이 게임'의 개명이다. 단순한 개명(改名)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스포츠’는 “정신적, 신체적 능력을 활용하여 승부를 겨루는 여가활동
(한국e스포츠협회 홈페이지)”이고, 프로팀이나 리그와 같이 기존의 프로 스포츠와 유사한
면모를 갖추었기 때문에 일렉트로닉(electronic)에 스포츠(sports)를 붙인 것은 개명 이상의
실질적 의의가 있다고 말이다.

'이 게임'에서 '이 스포츠'로의 개명에는 매우 영특한 의도가 담겨 있는 것 같다.
어둡고 칙칙한 지하 공간, 생산성 없는 시간 죽이기와 같이 '이 게임'으로 불릴 때 흡착된
이미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도이다. '이 게임'은 '이 스포츠'로의 개명을 통하여 유쾌, 건강과
같은 '스포츠 이미지'로의 변신 과정이 있다.

그 의도가 악의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쪽의 처지에서 보면 불가피한 점도 없지 않다.
뿐만 아니라 스포츠 영역 내부에서조차  ‘이 스포츠’의 등장 및 성장을 스포츠 영역의 확장 및 발전과
동일시하는 주장도 있다. 과연 그것은 스포츠 영역의 확장이자, 발전일까? '이 스포츠'의
정착에서 발생하는 이득이 무엇이고, 그 이익은 누구에게 어떻게 분배되는가? 
신중한 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다.

스포츠, 그리고 폼(form)과 땀

나는 ‘이 스포츠’라는 이름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스포츠에서는 ‘폼(form)’이 중시되지만,
‘이 스포츠’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축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축구의 폼이
필수적이며, 야구의 목적을 달성을 위해서는 야구의 폼이 필수적이다.
이렇듯 스포츠에서는 목적과 폼이 불가불의 관련이 있고, 따라서 스포츠에서는 폼이 강조된다.
'이 스포츠'에는 어떤 폼이 존재하는가? 키보드 빨기 때리기?
신체활동, 경쟁활동, 규칙확립 등과 같은 피상적, 부분적 맥락의 유사성을 근거로 하여
'이 스포츠'를 정당화하는 것은, 인간의 신체활동 능력의 확장, 인간의 신체활동을
기법의 향상을 추구하는 스포츠의 전통을 간과한 결과다.

바둑을 스포츠로 여기는 것 역시 그러하다. '이 스포츠', '바둑'을 (승부를 겨루는 활동 일반인)
게임이 아니라 스포츠에 포함시키는 것은 침소봉대(針小棒大), 견강부회(牽强附會)의 우를
범할 가능성이 크다.
‘이 스포츠’를 1시간하면 얼마나 땀이 나고 어떤 기분이 드는가?
‘이 스포츠’를 하고 나서 느끼는 피곤함과 테니스를 치고 나서 느끼는 피곤함의 차이는 
어떠한가? 둔중한 피곤함과 경쾌한 피곤함, 그것이 바로 부정하기 어려운 본질적 차이다.  

순진한 곰과 영리한 주인

순진한 곰(=전통의 스포츠 영역)과 영리한 주인(=‘이 스포츠’ 영역)이라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스포츠는 견고한 관념의 억압, 지난한 역사의 굴레를 이겨내고 이제야 번듯하게 인류 삶에
기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미흡하나마 열매를 거두고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스포츠를 업으로 삼아 척박한 불모지를 옥토로 바꾸고, 씨앗을 뿌리며, 나무를
가꾸었던가. 물론 그 열매가 그들만의 독차지일 수는 없다. 그렇다고 불한(不汗)의
편승을 강 건너 불처럼 용인하는 것이 미덕은 아닐 것이다.

‘이 스포츠’, 바둑경기의 안착에 앞장서고자 한다면 ‘이 스포츠’의 성행이, 바둑(경기?)단체의
성공이 스포츠 영역의 발전에 기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먼저 밝혀야 할 것이다.
(청소년이 주류를 이루는) ‘이 게임’, (장노년층의 참가가 활발한) 바둑을 전통의 스포츠에
편입시키면, 말 그대로 ‘생활의 스포츠’의 꽃은 피게 되는가? 국민 생활체육(스포츠)참가율은
놀랄 정도로 급등하게 되는가? 그렇다 하더라도 그 결과 산물은 무엇인가?
국민생활체육(스포츠)참가율의 상승은 체육(스포츠)영역에 어떤 피드백을 발생시키는가?
과연  ‘이 스포츠’의 성행, 바둑(경기?)단체의 성공에서 발생하는 이득은 누구의 몫이 되고 있는가?
(추상적) 대중? 국민? (구체적) 단체? 개인?

체육과 스포츠를 중심으로 하는 신체활동에서 연상되는 유쾌, 건강의 이미지 속에는
경박하게 처분할 수 없는 체육인, 스포츠퍼슨(sportsperson)의 땀이 흐르고 있다.
거의 유일한 자산인 유쾌, 건강의 이미지, 더 나아가 활발하고 건강한 삶의 이미지를 소중히
하는 것은 체육인, 스포츠퍼슨의 덕목이자 책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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