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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둥지 기자단

한국농구의 제자, 홍콩 국가대표팀과 함께한 일주일 -동아시아농구대회 통역기

 

 

 

글 / 최진경 (스포츠둥지 기자)

 

 

시작은 전화선을 타고
5월 어느 날, 아는 교수님으로부터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너 이번에 인천에서 하는 동아시아농구대회에서 통역으로 일 해볼래?” 순간 떠오른 생각들, 평소에 좋아하던 국가대표 농구선수들을 직접 볼 수 있겠구나. 경기도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으려나? 하고는 싶은데 과연 내 영어실력으로 될까? 등등. 하지만 영어를 잘하진 못해도 두려워하지 않기에 의사소통에는 문제없다는 믿음과 농구에 대한 열정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점을 내세워서 과감하게 오케이했다. 이렇게 나의 통역기는 시작되었다.


업무를 시작하기 전부터 나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8일 동안 선수들과 같은 숙소에 머무르기 때문에 짐을 싸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었던 것. 결국에 큼지막한 짐가방 하나가 가득 찼다. 꼭 해외여행 가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좋았던 기분도 잠깐, 무거운 캐리어를 질질 끌면서 집인 분당에서 송도에 위치한 대회 기숙사까지 가는 길은 결코 해외여행 길의 비행기에서 느끼는 안락함은 아니었다. 그래도 어렵게 도착한 숙소는 깔끔하고 좋아서 고생한 보람은 있었다. 뉴욕주립대의 송도캠퍼스에 위치한 게스트하우스였는데 새로 지어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훌륭했다.

 

깔끔한 숙소 시설과 식사중인 홍콩 팀 ⓒ최진경

 

 

홍콩 팀과의 첫 만남

아이러니하게도 첫 업무를 위해 향한 곳은 인천공항. 숙소에 던져놓고 온 캐리어를 다시 끌고 입국구역이 아닌 출국구역으로 향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면서 난 일주일동안 내가 맡을 팀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입국 게이트 앞에서 생전 본적도 없는 외국인들을 기다리자면 도대체 어떻게 서로 알아볼까 하는 궁금증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기다리는 이들은 홍콩 국가대표 농구선수! 그것도 국가대표! 문을 나오는 순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결코 작은 키가 아닌 (181cm) 본인을 난쟁이로 만들어 버리는 장신 둘이 문 뒤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반갑게 홍콩 국가대표 팀인지를 물었더니 역시나. 뒤이어 줄지어서 같은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과 스탭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들이 나의 8일 일정을 좌지우지할 사람들이기 때문에 주의 깊게 그들을 스캔. 다행히도 첫 느낌은 대단히 좋았다. 나이도 나랑 비슷한 또래로 보이고 까다롭지 않을 것 같은 느낌? 그중에서도 나와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될 팀매니져 앤디는 왠지 영화에서 본 것 같은 호의가 가득한 선량한 중국인 아저씨? 좋아. 홍콩 팀 첫인상 굿!

 

 홍콩 팀과 같이 숙소에 도착해서 배정된 숙소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왠지 익숙한 사람들이 같이 엘리베이터에 탑승, 그들이 나누는 대화가 들리는데 정현이형 이라는 소리가 들린다. 정현이형? 이정현? 하고 옆을 보니 빡빡민 머리에 미처 못 알아 봤던 KGC 이정현이 내 옆에 서있다. 꽤나 신기한 상황이지만 나는 일하러 온 사람이니 마치 이정현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듯 새침하게 엘리베이터 상황판만 응시. 평소에 유명인과 사진을 찍거나 싸인을 받는 취미는 없기에 그런 생각은 안 들지만 주제넘게 농구 경기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 농구는 볼 때 보다 직접 같이 해보면 실력이 확실히 느껴지는데 국가대표랑 같이 뛰면 어떤 느낌이 들려나.

 

대한민국 농구의 제자 홍콩농구

이정현이 속해 있는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연습은 못 보지만 홍콩 팀이 연습하는 걸 보면서 대리만족을 삼을까. 사실 이번 대회 전에 홍콩팀은 마카오와 함께 최약체라는 확인 안 된 정보가 떠다니는 것을 입수했기 때문에 크게 기대는 안했다. 그런데 연습하는 걸 보니 역시 국가대표는 국가대표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훈련하는 방식이나 몸 푸는 모습이 어딘가 되게 낯이 익는 느낌이다. 농구 연습이야 전 세계가 다 똑같으려니 생각하던 찰나 맞은편에서 훈련하고 있는 마카오 팀은 전혀 익숙하지가 않다.

 

 때 마침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인상 좋은 앤디 아저씨, “이 훈련법들은 한국인 코치로부터 배운 거다. 신동한, 신동한 아니?” 라고 물으며 신동한 코치와 같이 찍은 사진까지 보여준다. 아련한 기억에 옛날에 그런 이름을 가진 선수가 있었던 것도 같아서 알 것 같다고 했더니 대단히 좋아한다. 그러면서 얘기를 계속하는데 들어보니 신동한 코치가 홍콩에 한국식 농구를 가르쳐서 그들의 기량이 많이 향상된 모양이다. 그러면서 한국 농구는 자신들의 스승이라고 말하는 앤디의 말투에는 분명히 그에 대한 고마움, 나아가 대한민국에 대한 고마움이 서려있었다.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스포츠외교가 아닐까 생각됐다.

 

 안 그래도 마음에 들었던 홍콩 팀이 우리 대한민국의 제자 팀과 같다 하니 홍콩 팀에 대한 애정이 더욱 듬뿍 생겼다. 기왕이면 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뒀으면 하고 바랬다. 첫 날 세 번째 경기로 펼쳐질 홍콩의 상대는 중국. 중국 팀을 숙소 식당에서 봤는데 진짜 엄청나게 컸다. 역시 20억 분의 사나이라고 할 만 해. 궁금해서 프로필을 찾아보니 센터 두 명이 219cm, 214cm...... 홍콩 팀 최장신 선수가 207cm 엄청나게 큰 키인데 12cm가 더 크다. 내 기준으로 생각하면 내가 193cm짜리 선수를 상대해야 한다는 얘긴데 애초에 게임이 안 된다.

그래도 왕년의 NBA스타 아이버슨이 말했다. 농구는 신장이 아닌 심장으로 하는 거라고!

 

대회 시작. 기자회견 통역까지

오후 6시에 열리는 경기에 앞서서 4시에는 한국과 일본의 경기가 있었다. 이번 대회에서 최부용 감독이 가장 신경써서 준비한 상대로 일본을 꼽고 방열 대한농구협회장이 승리의 필요성을 역설했을 정도로 중요한 경기였다. 보고 싶었는데 마침 홍콩 팀도 한국 팀의 경기를 보고 싶다고 한다. 역시 스승의 경기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이유가 뭐든 나로서는 Thank you! 재밌는 경기를 기대하며 관중석에 홍콩선수단과 앉았다. 그런데 경기는 예상과는 다르게 원사이드. 한국의 압도적인 경기력. 특히 KGC 듀오 박찬희와 이정현의 속도가 압권. 굳이 같이 해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국가대표의 위엄. 같이 뛰어보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이어서 열린 홍콩과 중국의 경기, 전혀 기대하지 않은 채로 벤치에 앉았다. 내가 살면서 농구 팀 벤치, 그것도 홍콩 국가대표팀의 벤치에 앉을 줄이야. 그런데 경기는 예상과는 다르게 대 접전! 도대체 홍콩이 최약체라는 정보는 어디서 나온 유언비어였던 거냐. 심지어 전반이 끝난 시점에서 리드하고 있는 팀은 홍콩이었다. 재밌는 건 내가 이게 무슨 상황이야 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홍콩 선수들도 그랬던 것 같다. 홍콩 선수와 스탭 대다수가 전반전 스코어를 본인의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결과적으로 경기 결과는 후반전에 본 실력을 발휘한 중국의 완승이었다. 하지만 홍콩 선수단의 분위기는 승리 팀인 중국보다 더 좋았다. 경기 후 기자회견실에서 오늘 맹활약한 에이스 로우이탱과 감독의 인터뷰가 있었다. 이번 일을 시작하기 전에 유일하게 걱정한 자리인 만큼 상당한 긴장감이 몰려왔다. 하지만 여기서 15년 농구인생이 빛을 발했다. 까다로울 수 있는 질문에도 포스트업과 페이스업 같은 농구 용어를 사용해서 알아듣기 쉽게 질문했고 이런 단어를 알고 있는 기자들 또한 나의 통역에 만족하는 눈치였다. 생에 첫 기자회견장은 다행히도 성공이었다.

 

홍콩과 중국의 경기장면 ⓒ최진경

 

최선을 다하고 결과에 승복하는 우리는 '아마추어'다.
다음날 이어진 대회 둘째 날 경기. 실질적으로 홍콩에겐 결승과도 같은 몽고와의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홍콩으로서는 어차피 대회 우승보다는 5위까지 주어지는 아시아대회 진출이 목표였다. 몽고를 이겨서 결선리그에 진출하면 자동적으로 4위를 확보한다. 입국한 날부터 내내 미소를 잃지 않던 홍콩 팀이었지만 이날만큼은 진지했다. 이날 경기에 앞선 훈련에서 몽고와 같은 시간에 배정된 것을 두고 클레임을 걸 만큼 경기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덕분에 나도 경기 스케줄을 조정하기 위해서 양쪽과 소통하느라 애를 먹었다. 재밌는 건 어느새 나도 모르게 홍콩 팀의 입장에서 그들을 대변하고 있었다. 홍콩 땅 한번 밟아보지 못한 내가 3일 만에 홍콩편이 되다니 역시 스포츠는 흥미롭다.

 

그렇게 비장하게 시작한 대 몽고전, 경기는 시종일관 시소게임이었다. 게다가 이번 대회 대한민국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응원단을 보유한 몽고의 일방적인 응원은 더욱 경기를 불타오르게 만들었다. 자신들의 모국 팀이 수천킬로 떨어진 우리나라에까지 와서 경기를 하는 모습이 좋게 보일 법도 하지만 난 이미 반은 홍콩인, 상당히 보기 싫었다. 아무리 통역의 신분이긴 하지만 어쨌든 한 팀의 벤치에 앉아 있는 일원으로서 몽고팬의 목소리에 맞서서 열심히 파이팅을 외쳤다. 나의 파이팅이 힘이 된 것인지 결국 경기는 홍콩의 신승! 경기 후 감독이 경기장에서 홍콩을 응원한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고맙단다. 정말 나이스한 사람들이다. 이러니 응원을 할 수 밖에.

 

경기 후 인터뷰는 결선리그에서 만나게 될 한국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홍콩 팀은 한국과 본인들의 기량차를 인정했다. 하지만 홍콩의 주전 센터 던칸의 대답은 상당히 마음에 와 닿았다. “우리는 그들과는 다르다. 아마추어다. 우리 팀 선수들은 한명을 제외하고는 다들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다. 학생이거나 아니면 학교에서 운동을 가르친다. 프로로서 농구에만 집중하는 한국 팀을 이기기 힘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최선을 다 할 것이다. 이기고 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홍콩에서 또 봐요.
이어진 경기에서 홍콩은 역시나 한국에게 완패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말대로 최선을 다했다. 한국이 중국을 상대로 수비전술을 연습하기 위해서 홍콩 팀을 불쌍할 정도로 압박했지만 그들은 끝까지 자기들의 농구를 했다. 이어진 일본과의 3,4위전 또한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객관적인 전력에서 홍콩이 이길 수 없는 팀이지만 또다시 그들만의 농구로 경기를 3쿼터까지 접전으로 이끌었다. 결국엔 패배했지만 홍콩 팀의 표정은 최선을 다했다는 뿌듯함이 묻어났다. 프로스포츠의 특성 상 승패에 연연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승리에 집착한 나머지 여러 가지 안 좋은 얘기들이 많이 들리는 대한민국 스포츠의 팬 입장에서는 꽤나 부러운 모습이었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 공항까지 배웅을 나가는 게 업무의 마지막이기도 하고 꼭 일이 아니더라도 내가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끝까지 자기들이 알아서 갈 수 있다고, 농담으로 우리 똑똑하다고 왜 공항까지 오냐고 한다. 끝까지 나이스한 홍콩 팀이다. 결국 숙소에서 이별을 고하고 간단하게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홍콩에 오면 꼭 연락하란다. 자기가 통역해 준다고. 이거 통역사 대동하는 기분을 느껴보기 위해서라도 꼭 홍콩에 가야할 것 같다.

 

조만간 홍콩에서 만나요. 즐거운 홍콩 팀과 통역 ⓒ앤디(홍콩 팀매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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