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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별 체육이야기/[ 국제체육 ]

축구 통역의 조건

 

 

 

글 / 백종석

 

              흔히들 ‘통역’이라 하면 원어민 수준의 외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능력으로 생각하기 십상이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고, 따라서 영국을 떠나기 전, 영국 생활을 마치고 돌아올 때 기대되는 나의 영어 능력으로 통역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그 정도 수준으로도 통역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20대 후반에 외국에 나간데다 4년이 채 안 되는 해외 체류기간으로도 통역 일을 할 수 있었던 까닭은 향상된 내 영어 실력보다는 다른 쪽에 더 큰 이유가 있었다.

 

ⓒ백종석

 

 

3년 전인 지난 2009년 겨울,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첼시 FC에서 지도자 연수를 하셨던 국내 지도자 선생님을 도우며 한달 동안 개인 통역을 맡았던 것이 통역에 대한 공식적인 첫 경험이지만 1대 1로 통역을 하는 것이 아닌 여러 사람들 앞에서 공식적인 강의를 동시통역한 것은 2010년 11월에 파주에서 열린 2010/11 1차 AFC P급 지도자 교육과정이 처음이었다. 귀국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영어에 대한 감은 어느 정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최상위 축구 지도자 과정답게 수강생으로 오셨던 분들의 유명세는 나로 하여금 부담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론강의나 실기수업 모두 마찬가지로 영국인 강사 분께서 두세 문장을 말씀하시면 내가 곧바로 치고 들어가 빠르게 풀어내어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는데 그 기라성 같은 분들이 모두 내 입을 쳐다보는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그랬다. 내가 어떻게 통역을 하는지에 따라 이 중요한 과정의 성패가 갈린다는 생각에 처음에는 긴장도 많이 하고 실수도 했던 것 같다. 워낙 집중도가 필요한 일이라 원래 협회에서 통역을 맡고 계신 과장님과 교대로 일을 했는데 초반에는 더러 지적을 받기도 했지만 많이 조언해주시고 도와주신 덕분에 3주 가까이 되는 기간 동안 큰 사고없이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 후 현장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다 1년 뒤 다시 같은 선생님들 앞에서 3차 교육과정에 대한 통역을 맡았고 싱가포르에서 1년 지내다 이번 겨울, 그 다음 기수의 새로운 선생님들과 1차 교육을 함께 했다. 3년에 걸쳐 세 번의 같은 과정을 거치며 통역에 대한 능력도 더 자연스러워졌음을 느꼈다. 개인적으로 나 역시 그 분들과 같은 수업을 듣게 되는 셈이었던 터라 더할 나위 없는 공부와 경험이 되었음은 당연했다.

 

스스로 꼽는 내가 이 일을 생각보다 잘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 분야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테크닉’과 ‘스킬’처럼 축구에서는 뜻이 구분되지만 한국말로는 딱히 달리 표현하기 쉽지 않은 것처럼, 영국에서의 지도자 과정을 통해 습득하고 익숙해져 있지 않았더라면 빠른 순간에 적절하게 풀어내기가 힘들었을 만큼 축구 관련 표현과 용어들은 축구에 특화된 것들이 꽤 있었다. 또한 전술적인 상황이나 공과 선수들의 움직임에 대한 표현, 그리고 훈련 시 사용하는 은어에 가까운 표현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영어에서의 표현을 직역하기 보다는 우리가 쓰는, 그래서 지도자 분들이 더 이해하기 쉬운 한국식 표현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공을 가진 우리 편 선수에게 상대 수비수가 다가갈 때 경고해줄 수 있는 말, 공을 흘린다거나 슛하는 척 하면서 접는 동작, 수비 라인을 전체적으로 올리거나 내리는 상황, 수비 시 넓게 벌어져 있는 선수들을 안으로 좁힌다거나 공격수가 수비수를 상대로 등을 지는 표현, 훈련의 구성이나 방법, 성격 등에 따라 구분되는 훈련의 종류들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요새는 중계를 통해서도 핸들링, 센터링, 루즈타임 등 과거 정체가 불분명하거나 의미가 통하지 않는 용어들의 사용을 지양하는 추세인데 강의 도중, 아무래도 영어식 표현을 한국말로 그대로 바꾸기 힘들다거나 한국어의 문법적 특성 때문에 영국에서 쓰는 표현이 아니지만 이미 한국식으로 통용되거나 대체된 표현들을 유연하게 통역해야 하는 상황이 더러 생겼다. 강의 중에 강사님이 ‘백포’라고 설명하시면 내가 ‘포백’이라고 단어의 순서를 바꿔서 말한다거나, ‘헤더’라고 표현하시면 한국적 의미인 ‘헤딩’이라는 단어로, ‘코너’라고 말씀하시면 ‘킥’을 덧붙여 ‘코너킥’으로 통역했던 것은 비록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강의를 듣는 지도자 선생님들께서 더 알아듣기 쉽도록 나름대로 노력한 부분이다.


강의를 통역하는 것은 결국 외국어를 듣고 이해한 후 한국말로 표현해 내는 것이기 때문에 해당 외국어를 말하는 것보다는 듣고, 이해하는 능력이 우선이고 이를 바탕으로 얼마나 완성된 문장으로 만들어내 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그렇기에 (외국어)말하기보다는 듣기가, 듣기보다는 (한국어)말하기가 중요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강의가 몇 시간에 걸쳐 이어지면 집중력이 약해지고 놓치는 부분이 생기는데 이 때에는 듣기도 듣기지만 (한국어)말하기 능력이 매우 중요해진다. 순간 놓치는 부분이 있었더라도 그 단어나 표현이 전체적인 맥락에서 그리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면 자연스러운 진행을 위해 강사에게 되묻지 않고 이해한 것으로부터 부드럽게 포장해 말을 만들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상황은 최소화 시켜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가끔씩 생기는 이러한 상황에서의 순발력과 위기관리(?) 능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강사의 말하고자 하는 의도와 맥락을 이해하고 있는지, 내가 말하고 있는 문장의 완성도는 높은지, 주술관계는 들어맞는지 등 단순히 몇 문장씩 따로 떨어뜨려 통역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흐름을 따라가며 직역이 아닌 약간의 의역으로 한국말 자체를 잘 꾸미는 것이 중요하다. 결과적으로 수강생들이 듣는 것은 영어가 아니라 내가 말하는 한국말이기 때문이다.

 

해당 분야의 지식과 경험, 언어와 문화적 차이를 해석해 의역할 수 있는 융통성, 설사 놓치는 부분이 있더라도 전체적인 문장을 잘 만들어낼 수 있는 순발력. 이 세 가지가 영어 실력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특정한 분야의 통역을 할 수 있는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전문 통역사는 아니었지만 축구 지도자 교육에 대한 통역만큼은 영어실력이 비슷하다면 다른 어떤 사람과도 경쟁력을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외국에서 무언가를 공부하고 경험했다면, 그곳에서 익혔던 언어와 지식을 나와 같은 방법으로 써먹을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다. 축구가 아닌 다른 종목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스포츠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영어를 잘 한다고 어떤 분야에서나 통역을 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어느 정도의 영어실력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어느 정도’라는 것이 생각보다 낮다고 말하고 싶다. 유학을 하며 그 나라의 언어를 공부하는 까닭은 언어의 습득 그 자체보다는 해당 학문에 더 쉽고 깊게 다가가기 위한 수단이자 도구로서의 기능이 크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꼭 통역의 역할을 맡는 것이 아니더라도 외국어를 통해 느끼고 이해하는 바를 한국어로 받아들여 제 3자에게 쉽게 전해 줄 수 있다면, 외국에서 힘들게 공부한 보람이 훨씬 크지 않을까? 지식과 경험의 전파와 공유는 물리적으로 떨어진 두 곳 사이의 학문적, 문화적 간극을 좁혀줌은 물론 그 분야를 발전시키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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