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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에 대한 생각

              

 

 

글/김학수(한체대 스포츠언론정보 연구소장)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인 박찬호의 은퇴가 최근 스포츠계의 큰 관심사이다. 신문과 방송 등은 미국과 일본을 거쳐 한국까지 이어져온 19년간 그의 화려한 프로야구 인생을 조명했다. 박찬호는 말 그대로 대한민국 스포츠에서 가장 성공한 선수의 대명사였다. 미국 프로야구서 LA 다저스를 시작으로 17년동안 아시아 최다승인 124승을 올렸던 그의 기록은 당분간 깨지기가 힘든 대단한 것이었다. 많은 야구팬들이 그의 은퇴를 아쉬워하는 것은 그의 선수생활이 워낙 출중했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 최고의 미국 프로야구 무대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주고 한국 야구에 큰 열풍을 불러일으켰던 그의 모습은 팬들의 기억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특히 필자가 박찬호의 은퇴를 지켜보면서 섭섭하기도 하면서 다소 서운한 느낌이 드는 것은 전성기 때의 기억이 워낙 강렬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지난 해 일본을 거쳐 고국인 한국에 복귀한 박찬호는 5승10패에 그쳐, 전성기 때의 위용을 보여주지 못했다. 한국에서의 활약에 많은 기대를 했던 필자를 비롯한 팬들은 그의 성적에 큰 실망감을 느꼈다. 추락한 모습에서 전성기 때를 찾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명성을 쌓는데는 20년이라는 세월이 걸리지만, 명성을 무너뜨리는 시간은 단 5분도 걸리지 않는다. 그것을 명심한다면 네 행동이 달라질 것이다”라고 한 미국의 세계적인 사업가 워렌 버핏의 유명한 말처럼 박찬호는 올해 한국에서 메이저 리거의 화려한 명성이 초라한 성적으로 무너져 내렸다. 명성을 지키기 위해 좀 더 다르게 행동을 했어야 했는데, 그의 몸과 마음은 이미 전성기 때의 그것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사실 그의 은퇴는 부와 명성을 얻은 뒤 찾아오는 당연한 과정일 수 있다. 그러나 시기와 방법적으로 다소 잘못된 코스를 선택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든다. 미국무대에서 은퇴를 했다면 팬들사이에 그는 ‘영원한 메이저리거’로 아름답게 기억됐을 텐데 말이다. 박찬호는 은퇴직전까지도 선수생활에 대한 미련을 거두지 못하고 깊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올해 한국에서의 활동에 불만족스러워하며 내년에는 더 잘 할 수 있지않을까하는 생각도 가졌었다는 것이다.


박찬호는 원래 눈물이 많은 선수로 알려져있다. 감정의 흐름을 잘 타는 성격 탓이다. 3년전인 지난 2009년 1월, 국가대표팀 은퇴를 선언하며 많은 눈물을 쏟았던 것은 유명하다. 제2회 WBC가 열리기 직전이었던 당시, 필라델피아로 이적한 상황이었다. 그는 “솔직히 자신이 없다. 새로운 팀에서도 잘하고 국가대표팀에서도 잘 할 수 없을 것 같다”며 은퇴를 선언하면서 눈물을 보였다. 30일 은퇴 기자회견에서도 눈시울을 뜨겁게 붉히며 선수 마감의 아쉬운 미련을 밝혔다. 감성적인 세태의 영향으로 남자들도 눈물이 많아지는 분위기이지만 중요 고비때마다 흘리는 그의 눈물은 큰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1998년 여름, LA 다저스 소속으로 활동하던 박찬호의 경기를 LA 다저스 스타디움에서 직접 본 적이 있었다. 미국 프로야구 경기장을 처음 찾은 필자는 엄청난 스타디움 규모, 주차장 크기에 놀랐으며 이러한 좋은 여건에서 에이스로 활약하는 그의 활약에 한국인으로서 큰 자부심과 긍지를 느낄 수 있었다. 당시 한국은 외환위기로 IMF의 체제속에서 어렵게 경제를 이끌어가던 시점이어서 미국에서 스포츠를 통해 한국인의 우수성을 과시하는 그의 모습에 많은 팬들과 미국 교포들도 큰 위로와 힘을 받았다.


사실 박찬호가 1994년 처음으로 LA 다저스와 입단계약을 맺을 때만해도 그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 야구전문가들조차 반신반의했었다. 150km의 강속구 위력을 갖고는 있으나 컨트롤 불안으로 한양대에 재학중이면서도 최고 투수 대우를 받지는 못했을 정도였다. 다저스 입단이후 2년간 마이너리그로 밀려나 고난과 역경의 시간을 보냈던 박찬호는 1997년부터 2001년까지 5년간 최전성기를 맞았다. 연평균 15승을 거뒀고, 2000시즌에는 18승을 수확하며 메이저리그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대투수가 됐다.


박찬호의 전성기는 한국 스포츠 언론에 새로운 전기를 만들어주는 계기가 됐다. 사상 처음으로 박찬호의 활약상을 현지에서 직접 취재하기 위해 메이저리그 특파원을 파견하게 된 것이다. 일간스포츠의 후배기자 장윤호가 1호 특파원으로 파견된데 이어 스포츠 서울 문상열기자, 스포츠 조선 민훈기 기자, 스포츠 투데이 구자겸, 성일만 기자가 미국 현지에서 활동했다. 메이저 리그 특파원은 특파원의 꽃이라할 수 있는 워싱턴 특파원에 못지않은 인기와 명예를 스포츠 기자들에게 안겨주었다. ‘박찬호 특파원’으로 불리기도 했던 메이저리그 특파원들은 박찬호 뿐 아니라 미국 프로야구에 대한 상세한 기사를 보내 한국 야구팬들의 수준을 크게 향상시켜 주었다.


박찬호의 고액 연봉은 항상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2001시즌 후 FA자격을 얻고 5년 6500만달러라는 대박계약을 터트렸다. 언론들은 “박찬호, 하루 5천만원씩 번다”라는 큼직한 활자를 1면에 뽑기도 했다. 하루 5천만원씩을 번다는 사실 자체가 일반인들에게는 입이 턱 벌어질 정도의 천문학적인 숫자였으니까. 미국에서 큰 돈을 벌은 그의 재테크 관리도 큰 관심을 끌었다. 서울 강남 신사동의 10층짜리 빌딩을 매입, 수백억원의 이익을 남긴 그의 재테크 비결은 한동안 많은 사람들의 화제를 낳았다.


아마도 미국 프로야구에서 활약했던 그의 선수생활이 팬들의 가슴에 더욱 새겨진 것은 세계최고라는 미국 무대에서의 성공기, 돈, 개인적 생활 등이 어울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오늘의 박찬호를 있게한 메이저리거의 모습을 팬들은 더 그리워할 수 밖에 없다.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서 멋있게 은퇴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생기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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