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왜 우리의 웃터골을 빼앗았는가?
글 / 조준호(대림대학 사회체육과/ 교수)
인천체육의 성지 웃터골공설운동장(현 제물포고등학교 운동장)은 인천시민의 애국심발원지(發源地)였다. 그곳은 항상 인천시민들의 땀 냄새, 운동장의 흙냄새, 그리고 바닷가의 짠 냄새가 뒤섞여 인천특유의 냄새가 뿜어지는 가장 향토색이 짙은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한·일간의 야구대결이 있을 때면 인천시민은 대한민국(大韓民國)을 가슴에 품고 그들과 함께 달렸다. 서슬 퍼런 일제강점기였지만 웃터골에서 만큼은 야구를 통해 자연스럽게 우리나라를 응원할 수 있어 뜨겁게 용솟음치는 애국심을 달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웃터골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천연분지였기에 정확한 생성 시기는 파악하기 어렵다. 아주 오래전부터 인천부민과 함께한 웃터골은 개항기 스포츠의 산실이었다. 그곳을 확장, 재 확장 하고 단어 앞에 공설(公設)이라는 단어만 붙여 어느 순간부터 웃터골은 인천의 공설운동장이 되었고 일제강점기 그곳은 인천시민들보다 일본인들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1933년 발간된 인천부사(仁川府史)에 의하면 1905년의 인천인구는 일본인이 12,712명, 한국인이 10,866명, 중국인이 2,665명, 구미인이 88명으로 한국인들보다 일본인이 더 많았다. 그래서일까. 일제강점기 인천살이는 “살기는 좋아도 흥! 왜놈의 등살에 못살 곳”이었다. 그곳으로 서양의 스포츠는 자연스레 미끄러져 들어왔다.
본 고(考)에서는 인천체육의 성지 웃터골운동장에 관한 역사적 진실을 살펴보고 또한 일제가 우리의
웃터골을 빼앗는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현재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를 상기해보고자 한다.
1. 웃터골 확장에 관한 기록의 오류?
웃터골은 1920년 11월 1일, 2천 3백 63평의 ‘그라운드’ 형태를 갖춘 공설운동장으로 확장되었다. 뿐만 아니라 1933년 발간된 『인천부사』에 의하면 웃터골은 “1926년 6월에 공사비 일만원을 들여 6천 450평으로 재 확장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인천부사』기록 때문일까? 인천역사 대부분의 서적에서는 웃터골 재확장의 시기를 1926년 6월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1927년 4월 18일자⟪매일신보⟫에 의하면 “1926년 10월부터 웃터골 확장공사를 실시하여 금액 일만 삼천 오백 원의 공사비를 투입, 예정보다 1개월 연기되어 4월 말에 대망의 공사가 완공될 터”라는 신문기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같은 신문 1927년 6월 29일자에는 “예정보다 공사가 3개월이 더 연장하야 본월 중에나 완공”이라는 신문기사와 “인천공설운동장의 확장공사는 낙성되었으므로 인천부에서는 7월 10일경 낙성식을 거행하는 동시에 시민대운동회를 개최키로 하였다”는 기록(매일신보, 1927년 6월 30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웃터골이 6천 4백 50평으로 재 확장된 정확한 시기는 1927년 6월 30일이었고 시민들의 활용이 가능했던 시기는 1927년 7월 10일이었다. 웃터골 재확장의 역사적 진실, 우리에게 알려진 시기와 약 1년여의 차이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2. 2. 일제는 왜 우리의 웃터골을 빼앗아 갔는가?
웃터골은 당시 인천에서 가장 좋은 위치, 우리민족의 정기가 살아 숨 쉬는 곳으로 운동장 이상의 가치가 있는 성스러운 곳이었다. 그곳을 일제는 탐냈다. 당시 인천에는 일본인이 다닐 인문계 학교가 없었다. 즉 일본인 자녀가 인문계를 다니려면 경인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일제는 이를 이용했다. 일제는 웃터골을 빼앗아 그곳에 일본인의 자제들을 위한 인문계 학교를 세워 우리민족의 정기말살과 일본인의 실제적 교육을 위한 일석이조의 사업아이템을 구상했다. 일제는 주저하지 않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그 내용은 ⟪동아일보⟫ 신문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확인 할 수 있었다.
경기도 당국 경상비 일만 오천원 중 8천원 보조할 것을 비밀리에 승인하여 오는 4월
1일부터 55명을 한 학급으로 개교하기로 내정되어 있다는데 그 중에서도 우리의 이목을 끄는 것은 신축교사의 부지이다. 인천부에선 되도록 함구하고 비밀리 진행시키려고 한다는 바, 그 복안은 산근정에 있는 공설운동장에 교사를 짓고 공설운동장은 부내 도산정으로 옮길 작정이라 한다(동아일보, 1935년 3월 1일자).
이는 일제의 간악한 속내의 결정판이었다. 이에 대한 인천의 부민들은 크게 불평(不評)하였다. 하지만 힘이 없는 인천부민들의 외침은 그저 메아리가 될 뿐이었다. 일제는 이와 같이 웃터골을 빼앗았고 인천부민들에겐 새로운 제안을 한다. 바로 시 외곽지역인 도산정에 새롭게 공설운동장을 신설해준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일제가 동경올림픽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기 위해, 즉 일제 스스로를 위해 공설운동장을 도시 외각 지역에 건립하는 것뿐이었다. 결국 인천체육의 성지인 웃터골을 빼앗기고 새로운 공설운동장을 반기는 인천부민들은 아무도 없었다. 슬픔을 넘어 분노(조선일보, 1935년 3월 26일)하였다. 하지만 나라 잃은 인천부민들의 힘없는 메아리는 거기까지였다. 그렇게 일제는 우리에게서 웃터골을 빼앗아갔다.
그림2. 인천 각 학교 연합대운동회(자료출처: 인천문화재단, 2006: 138)
3.
3. 잘못된 진실?
웃터골을 빼앗은 일제는 공설운동장 신설을 제안하며 도시의 외곽지역인 도산정에 인천공설운동장 건립을 계획하게 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웃터골공설운동장은 중학교기지로 제공하고 내년부터 도산정에 대 공설운동장을 신설한다는 것은 보도해온 바와 같거니와 어제 도당국으로부터 그것이 인가되어 지난 21일 오전 9시부터 입찰을 개시하여 결국 삼만팔천원에 경성 시전조(柴田組)에 낙찰되었다는데 이는 도당국의 예산보다 6천원을 초과한 것이라 한다(동아일보, 1935년 8월 23일자).
이러한 계획을 통해 인천의 도산정(도원동)공설운동장은 1936년 8월 2일 개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도산정의 공설운동장 개장을 기념하기 위해 일제는 시민 대운동회를 개최하였다. 하지만 인천의 대다수의 향토서적들은, 심지어 인천의 역사를 자부한다는 한 공공건물의 개항장 연표에는 1934년 6월 30일을 도원동 공설운동장의 준공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위의 신문기사에서 확인 했듯이 도원동 공설운동장을 신설하겠다는 도당국의 인가가 1935년 8월 21일에 허가를 받았다는 신문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약 2년의 시기가 잘못 표기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공설운동장과 관련된 잘못된 진실은 체육사에 소홀했던 우리의 책임이 크다.
그림3. 2011년 현재 인천개항문화연표
웃터골운동장은 그렇게 일제에 빼앗겼으며 그곳은 그들만의 공간으로 완성되었다. 정작 내 나라의 주인들은 체육성지(聖志)를 잃고 일제의 힘의 논리에 의해 새로운 장소인 도산정으로 공설운동장을 이전하여야 했다. 최근 독도에 관해 일본은 매우 특이한 주장을 내세우며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있다. 일제의 그 논리가 말도 안 되는 것이라 하여도 우리는 더욱 정신을 바짝 차리고 독도 역사 찾기와 힘을 길러야 할 것이다. 멀리보고 체계적으로 준비하는 일본, 그들에게 철저히 빼앗겼던 웃터골의 교훈을 통해 바른 역사를 정립하는 대한민국, 힘 있는 대한민국이 되도록 대(大)한국인 모두가 하나로 뭉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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